땅이 모르는 비밀은 일어나지 않거나 앞으로도 영영 일어날 리 없는 것들 뿐이다.
0. 1915년 어느날
지금은 폐간된 신문사 1915년
유라시아 재단에 대해 은밀하게 퍼지는 소문의 실체, 재단의 내부 분열인가?
파헤쳐진 묘, 무덤 도굴꾼의 소행인가? 불안에 떠는 시민들, 범인이 노리는 것은?
무덤 도굴꾼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유라시아 재단보다 더 논쟁거리는 의미 없이 파헤쳐진 묘이다.
보통 도굴꾼들은 수십 분 내에 도굴을 끝낸 후 무덤을 원상복귀한 후 시신을 운반하는 것에 대해 자랑으로 여기는데 이 도굴꾼은 물건이나 시신에 손 댄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제스프리 골드가 시신을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시신은 아주 보관이 잘 된 깨끗한 상태였다고 한다. 간혹 후두부에 상처가 있지만 그건 시신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실수라고 말했다.
귀족이나 왕실에서는 묘지 꾼과 경비병을 세워 묘지가 파헤쳐질 일은 없지만 일반 시민들에게 묘지 꾼을 고용하는 것은 빠듯한 살림살이에 골칫거리 하나를 더 끼얹는 셈이다. 묘지 꾼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1명이 100구가 넘는 묘지를 지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시민들이 돌아가면서 묘지를 지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 돼버린 지금, 시민들의 불안은 점점 심화하고 있다.
파헤쳐진 묘, 범인은 묘지지기? 당신의 묘지지기를 믿지 마라, 시민단체 <미스테리아> 1915년
화재를 진압하고 뒤늦게 밝혀진 사실, 수리부엉이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 버터 스콘 실종? 경찰은 대체 뭘 하는 것인가, 시민들의 불안 가증, <런던 가제트> 에서 발췌
버터 스콘의 행방 여전히 오리무중. 삼 일이 지나도록 수사 진전은 없으며 경찰은 찾고 있다지만 부녀자와 농담하면서 웃고 있다, 경찰이 기자를 발견하고 카메라를 뺏으려고 모습이 찍혀있다.
1. 베일에 싸인 환자
병원으로 출근한 골드는 간호사 애쉬로부터 한밤중에 후원 재단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황당무개한 이야기를 듣는다.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불면증과 거리가 먼 애쉬로부터 이같은 허무맹랑한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골드는 그녀에게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이냐, 말하자 애쉬는 트레이드마크인 코끝을 평소보다 더 과장되게 찡그리며 아니라고 발끈하더니 모퉁이를 돌아가 버렸다.
애쉬는 요령은 있지만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이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쯤이면 까마귀 고기를 먹은 사람처럼 다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원장실로 들어가자 애쉬가 말한 대로 완벽한 직사각형의 반듯한 은색 쟁반에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편지는 꽤나 두툼했다. 극비라며 빨간색으로 선명하게 갈까마귀 문양이 들어가 있는 그 편지를 보자 골드는 머리끝이 서면서 불안함을 느낀다. 유라시아 갈까마귀 재단, 소수의 고위 귀족이 서민들을 위해 만든 곳으로 왕실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들까지 지원하며 보육원부터 병원, 연구소까지 손을 안 뻗치는 곳이 없는, 겉으로는 선한 기업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누가 운영하는지 실체를 알 수 없는 재단이었다.
골드 또한 유라시아 갈까마귀 보육원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현재 연구하고 있는 새로운 의학 연구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곳이었다.
진짜 어젯밤의 폭우를 뚫고 온 것인지 편지와 글씨 끝이 젖은 흔적이 있었고 말려 오그라들어 있었다. 골드는 글씨 끝이 젖어 번진 흔적을 엄지로 쓱 만져본 뒤 편지의 끝을 찢어버렸다.
유라시아 정신병원
병원장 제스프리 골드 앞
친애하는 골드 병원장님께
유라시아 정신병원의 새로운 병원장으로 취임하셨다는 소식을 지역신문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이는 유라시아 갈까마귀 재단이 후원하는 수많은 인재들 중 당신의 역량이나 재량보다는 우리 재단의 재정과 저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겠지요.
칭찬은 이쯤으로 해두고 곧 당신의 병원에 환자 한 명이 도착할 겁니다.
여기까지 읽은 그는 언제부터인지 마차 한 대가 병원 후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종소리가 울리고 간호사 애쉬가 곧 나와 정중하게 마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본다.
거두절미하고 우리 재단의 두 번째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리부엉이 가문의 장녀이지만 후계자에서 밀려난 패배자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점은 이해하시길. 그래도 수리부엉이 가문이 유명한 의사 집안인 것은 공부만 했다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당신이라도 아는 사실이겠지요.) 그녀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내심 노력했지만, 그녀는 그럴수록 우리들을 기만하고 경시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멈추지 않았답니다.
우리의 각고의 노력에도 그녀의 병은 완치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가문으로부터 집안 내력인 편집증과 신경증을 앓는다는 진단을 받아냈습니다. 이는 편지에 함께 동봉했으니 확인해 보시면 거짓이 아님을 아시게 될 겁니다.
저희는 귀하께서 그녀를 성심성의껏 치료하고 돌봐주길 바라며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치료 기간에 관해서는 우리 재단과 수리부엉이 가문과 논의 끝에 그녀가 평생 정신병원에서 귀하가 새롭게 연구 중이라는 전두엽 절제술을 치료받는다는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유라시아 갈까마귀 재단은 귀하의 연구 결과에 여전히 많은 기대를 하고 있으며 재정적 지원을 아낌없이 지원 할 것입니다.
추신
재단에 대한 의미 없는 소문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영향력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일 뿐이니, 앞으로 방종한 입을 놀리지 못하게 될 사람들을 향해 건배.
골드는 편지를 찢을 듯이 책상에 내려놓았다. 부탁을 가장한 협박에 편지를 찢어버리고 싶지만, 자신의 연구를 지원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에 골드는 이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협박이 없더라도 그는 재단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곧 애쉬가 병원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고 골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베일에 싸인 환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후문은 자존심 쎈 귀족들이나 몰래 뒷돌을 주고 빼돌린 환자들을 위한 용도였기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2. 제스프리 골드의 메모
신문 기사와 짧은 편지 한 통도 있다. 필체는 제스프리 골드의 것으로 휘갈겨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글자도 몇몇 보인다.
유라시아 정신병원의 병원장이 20년 만에 바뀌었다는 소식입니다. 기존 병원장인 시벨(74)은 그간 환자들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만 이번에 이곳으로 새로 부임한 제스프리 골드(35)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학생회장 출신으로 뛰어란 리더쉽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의학과 분석학을 수석졸업한 것으로 알려져…<타임즈>에서 발췌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이번에도 갈까마귀 우두머리가 보낸 것이었다.
오늘 밤 뻐꾸기와 함께 관 하나가 도착할게요. 은밀하게 운반하시오. 당신은 믿음직한 사람 한두 명 정도 뽑아 같이 일을 도모해도 되나, 되도록 그런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
환자는 관 안에 있습니다만 당신이 할 일은 오로지, 그녀를 안전한 곳에 보호하고 관리하는 겁니다. 수리부엉이 가문에서 그녀에게 전두엽 절제술 치료를 철회했으니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좋겠소.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병원을 방문해서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리다.
1915년 3월 7일
우라질! 303호의 환자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치료도, 병력 진단 없이 입원시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손도 대지 말라니. 이런 오만한 작자를 보았나! 이미, 환자는 병동 안으로 들어왔고 입원 절차도 다 끝냈는데, 저 살아있는 실험체를 사용할 수 없다니.
1915년 3월 18일
나는 뒤에서 수레를 미는 애쉬에게 서두르자며 재촉했고 묘지 꾼은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애쉬는 숨을 헐떡거리며 또 어둠 너머를 보고 있다. 비 때문인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가까이 가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되지 않는다. 얼굴로 쏟아지는 비에 우리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지만, 이곳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비도 진흙도 아닌 사람이다. 그때, 우리의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국을 지우던 묘지 꾼이 내 어깨를 붙잡아 멈춰 세우더니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귀를 바짝 세웠다. 빗소리리라. 그렇게 여기면서도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빗물이 자꾸만 장화 속으로 들어와 미끄러웠지만, 나는 발가락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가 다시 손짓하자 얼굴에 쏟아지는 물줄기는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우리는 다시 수레를 끌고 이동했다. 우리는 무사히 시체를 병원으로 가져왔다.
1915년 3월 21일
전기에 살이 익는 냄새, 머리에 구멍을 뚫자, 간호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기절해 버린다. 남자 의사들도 고개를 돌리거나 코를 막으며 구역질이 나는지 웩웩하며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낸다. 저렇게 비위가 약해서야. 쯧쯧. 하나둘 기절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한 없이 유약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들 속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애쉬를 바라봤다. 그녀는 힘든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냉철하고 빠르게, 에테르를 구멍 속에 넣는다. 행동에 군더더기 없고 재빨리 해치운다. 누구나 유능한 존재이고 싶어 하지만, 마음만 앞서는 그들과 다르게 애쉬는 정말 특출난 존재다. 어디서 이런 존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싶을 정도다.
1915년 4월 2일
정말, 지긋지긋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죽은 시체만 가지고 실험을 계속해야 할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애쉬에게 거짓말을 한 지도 1년째였다. 시체를 가지고 실험하는 건 이제 충분했다. 이제는 진짜 살아있는 시체를 가지고 실험해야 할 때였다. 병원 환자를 가지고 실험을 하면 말이 많아서 그것은 피해야 했다. 애쉬에게 좋은 방법이 없냐고 물었다. 그녀는 버들로우 다리 밑에서 사람을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해 왔다. 기가 막힌 그녀의 제안에 나는 옳다구나 싶어, 어서 빨리 실행에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실험체를 만난 건 쉽지 않았지만, 애쉬가 몇 날 며칠 고생해서 불구가 된 사람 하나를 몰래, 한밤중에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
1915년 4월 3일
애쉬가 전기충격으로 마취시키면 나는 재빨리 얼음송곳과 망치로 안구를 통해 전두엽 안쪽까지 휘저었다. 환자가 마취가 잘 됐는지 미동도 없다. 15분 안쪽으로 수술은 깨끗하게 마무리가 됐다. 그의 불구는 치료하지 못했지만, 그의 전두엽은 누구보다 깨끗하고 확실하게 치료가 됐을 것이다. 그는 어리둥정하게 눈을 든다.
1915년 4월 11일
말, 태도, 행동들이 모두 유순하고 자연스럽다. 유레카! 성공이다. 이제 이 실험을 몇 번만 더 하면 학회에 보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인류 최초의 전두엽 절제술로 새로운 의학의 문을 열게 될 것이고 행동교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혁신적인 치료법이 될 것이다.
1차 실험이 성공하자 애쉬에게 더 이상 묘지 꾼에게 품삯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애쉬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조용히 기쁨을 표현했다. 하지만 다음 번 환자를 구해와야 한다는 내 말에, 그녀의 낯빛은 창백해 졌고 말은 더듬더듬 거리며, 이 일을 두 번이나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는 그간 그녀가 해 온 일들을 빌미로 협박했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눈문을 그렁그렁 매단채 애절하게 나를 쳐다보고는 나갔다.
1915년 4월 13일
폭풍우가 몰아닥칠 것 같다. 모든 것이 스산하고 음산하기만 하다. 마치, 하늘이 노한 것처럼 구름이 욕심을 득실득실 몰고 오고 있다. 최근에, 병원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돌았다. 한밤중에 순찰을 하면 어디선가 희미하게 여자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나는 소문의 출처를 알지만, 그녀들을 안심시키며 그러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소문을 빨리 잠재워야 해.
1915년 4월 23일
좀 더 많은 살아있는 실험체가 필요했다. 순찰하는데 3층에서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303호일 거다. 가끔 저 방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이렌처럼 아름다운 목소리에, 홀릴 것 같다. 내일 애쉬에게 좀 더 단단하게 입마개를 조이라고 해야겠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한 가지 빛이 스쳐 지나갔다.
1915년 5월 2일
며칠 고민한 끝에 간호사들을 내보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이 일은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려면 오직 나만 알아야 했다.
3. 애쉬 하트의 이야기 1
오늘 수고하셨어요, 다른 간호사들도 오늘 일 마무리가 되면 퇴근하라 하세요. 병원장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애쉬는 그간 병원장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순식간에 녹았다. 사흘간 야근으로 고단한 애쉬는 병원장의 한마디는 기적과도 같았다. 병원장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나온 애쉬는 오랜만에 집에서 느긋하고 편안하게 목욕할 참이었다, 이 희소식을 다른 간호사들에게 전하자, 그들의 얼굴은 환해졌다. 한 간호사는 바로 전에까지 다 죽어가던 얼굴에 홍조와 화사한 꽃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서둘러, 오늘의 일을 끝마치면, 순서대로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애쉬는 바빠지는 그들의 손놀림과 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일찍 일을 끝낸다고 하더라도 수간호사인 애쉬는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환자 병동을 둘러보고 깊은 한숨을 내쉰 애쉬는 적막과 고요가 가득한 병원의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바깥공기였던가. 환자들의 비명과 피 냄새, 그리고 살이 익는 냄새는 정말이지 참기 힘든 고문이었다. 특히 연구비가 모자라 죽은 시체를 도굴했던 때는 얼마나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가. 묘지기에게 돈을 쥐여주면서 그에게 절대적인 침묵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를 빼내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 진절머리 나는 짓도 여러 번 하다 보면 점점 무뎌진다는데 애쉬는 조금도 그 일에 익숙해지기는커녕 구역질과 비위만 약해졌다.
거기다 병원장은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내게 시키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수간호사지, 그의 뒤처리 담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는 버로우 다리 아래에서 사람을 구해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환자들을 가지고 실험한 적도 있으면서 내가 환자들이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비인륜적이라고 말했다. 뻔뻔하기는.
최근에, 거머리 채혈과 구더기 치료법은 베테랑 간호사들도 참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얼음송곳이었다. 머리뼈에 구멍을 내어 그 안에 에탄올을 넣는 기존의 방식에서 전기충격으로 환자를 기절시킨 다음 얼음송곳을 안구의 안쪽으로… . 상상만으로 속이 다시 메스꺼워진 애쉬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부터 내일 아침이 오기까지 그것들과 마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거웠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303호 환자는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둬야 할까. 병원장은 애쉬에게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한 명 구해달라고 했지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며칠을 하다 관두고 말았다. 돈을 넉넉히 준다고 하더라도 하루 만에 관두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신문에 구인 광고를 내도 이제는 사람이 구해지지 않는다. 하, 이러면 또 버들로우 다리 아래로 가야 했다. 그곳에는 실업자들이나 굶주린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은 돈이라면 환장하고 먹을 거엔 물불 안 가렸다. 애쉬는 내일까지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주말에 그 버들로우 다리 아래로 가볼 참이었다.
서늘하고 스산한 공기를 애쉬는 폐 깊숙이 들이마시며, 찌뿌드드한 몸은 기지개를 켰다. 정문으로 향하던 애쉬는 검붉은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지? 이 늦은 시각에? 응급환자라면, 저렇게 있을 리 없었다. 벌써 벨이나 닫힌 문을 두드리며 난리법석을 피울 테니까.
애쉬는 수상쩍은 그 마차를 보며, 정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문을 닫으려는데,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괴기한 목소리에 애쉬는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 본 애쉬는 갈까마귀 우두머리와 그의 오른팔이자 아첨꾼이 뻐꾸기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또 만나는군, 애쉬 하트.
그녀는 귀신을 본 것처럼, 온몸이 차갑고 딱딱해지고 말았다. 늘 애쉬를 음흉하게 쳐다보는 뻐꾸기 덕분에, 애쉬는 숨도 쉬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병원장은 안에 계신가?
갈까마귀 우두머리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그의 권위적인 말투에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그리고 그 말에 여전히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한 사람은 그녀를 죽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를 살린다. 여기에, 그녀 자신 외에 누가 알까.
그들을 데리고 애쉬는 303호로 향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의 연장이 계속되자 애쉬는 숨이 막혔다. 남들은 재수 없는 일도 모두 잘만 피해 간다는데, 자신만 그걸 못하는 것 같았다. 애쉬는 걸음걸이에 속력을 내다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멈추었다. 303호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아직 누가 퇴근을 안 한 걸까. 맙소사! 저 방은 10개의 자물쇠로 잠겨있는데! 대체 누가!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잡으며 뛰다시피 걸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 아. 하며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누군가 있었다. 애쉬는 눈을 부릅떴다. 아, 맙소사…. 그곳에 있던 사람은 병원장이었다.
다음날 애쉬는 초조해하는 병원장을 보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그는 퍽 늙어 보이고 여유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잘 안 풀렸던 걸까. 무엇인가 겁에 질린 듯한 병원장의 모습에 애쉬는 이 모든 일들이 베일에 싸인 그 환자 때문이라는 걸 안다. 대체, 어젯밤 병원장은 왜 303호에 있었던 걸까? 게다가 관까지 열려있었다. 그는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 하나는 그 병실에 들어간 것. 우리는 그 병실의 환자를 아직 치료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갈까마귀의 우두머리가 아직 우리에게 허락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관을 열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것. 이 이야기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사흘 전, 그 의문에 환자가 도착했던 그때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이 모든 건 다 베일에 싸인 303호 환자 때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 환자만 아니었다면, 내가 그 더러운 뻐꾸기를 다시 마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관에 들어있는 그녀는 대체 누구 일까. 폭풍우 치는 그 거리를 달려 올 만큼 갈까마귀 우두머리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왜 그녀는 그를 그렇게 증오에 찬 눈으로 본 것일까. 그리고 그 구역질 나는 입에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추면서 왜 그녀를 그 안에 가둔 것일까. 애쉬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갈까마귀 우두머리는 늘 이곳 사람이 아닌 듯한 인상과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이다.
4. 이름을 빼앗긴 여인의 수기 1
덤덤하게 쓰여있지만 문체가 슬픔으로 가득하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신은 그저, 행복을 꿈꿨을 뿐인데, 소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운 고향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 아니며, 바닷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갈까마귀, 당신을 사랑했던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존재했던 그 시절부터 해야 할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야기는 시작해야 하니까. 내 인생은 총 세 명의 남자가 지나갔고 그들에 의해, 나는 변화하게 된다.
어린시절 이유 없는 매질은 늘 있었고 매질을 당한 날엔 늘 바다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첨벙 하고 들어가자 맞은 볼이 따갑다. 그래도 꾹 참고 몸을 천천히 눕혀 세상을 보았다. 인어공주가 그토록 땅을 동경한 이유를 소녀도 알고 있었다. 반짝이는 태양 빛이 반짝반짝이며 윤슬처럼 빛이 났다. 빛은 물 위를 산란하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배회하다 굴절되었다. 그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답고 기묘했다. 물에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반기지 않는 집, 수군거리는 사람들, 소녀를 가엽게 여기는 그네들의 눈빛은 진절머리가 났다. 그럴 때면 소녀는 노래를 불렀다. 소녀는 입을 동그랗게 모아 아, 하고 길게 음절을 내뱉었다. 물속에서 숨을 제일 잘 참는 소녀가 물질보다 잘하는 건 바로 노래였다. 이모는 소녀가 노래를 하면 꼴 보기 싫다며 싫어했다. 이유도 없이 맞는 건 이제 싫다. 그러나 이 섬에서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은 어디에도 없었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난 소녀는 다음 곡을 부르고 그다음 곡을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는 이 섬에서 처음 보는 남자를 만났다. 바로 그가, 내 인생의 첫 번째 변화시킨 남자였다.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서쪽에서 왔다는 그 남자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소녀의 마음에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행자와 그의 나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름답고 이상한 나라인 건 분명했다. 어쩌면 조금 전 그가 준 캐러멜처럼 서양과자의 맛이 날지도 몰랐다,
그는 내일이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조급해진 소녀는 그에게 뱃일이든 청소든 뭐든 할 테니 자신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여행자는 소녀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보았다. 소녀는 그에게 자신은 천애 고아이며 이 섬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여행자는 곤란한 눈치였다.
그가 여전히 망설이자, 소녀는 막무가내로 돈도 필요 없다, 그저 먹고 재워주면 된다, 또 그에게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헤엄을 쳐서라도 따라가겠다고 하자 그의 얼굴은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그는 깜짝 놀라며 아름다운 목소리야, 오페라에 걸맞은 목소리를 갖고 있구나, 라고 했다, 오페라가 뭐죠? 소녀가 물었다. 사람들 앞에서 지금처럼 네 예쁜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연기를 하는 거란다. 하지만 내 쇼도 그에 못지않단다. 너는 내 쇼 주무대에 세울 수 있겠어. 그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과 함께 허락이 떨어졌다.
그날 소녀는 남자를 따라 몰래 배에 올라탔다. 소녀의 티켓을 아직 구하지 못했고 그는 이제 떠나야 했기에 그들은 통 하나를 비워 거기에 소녀를 숨기기로 한 것이다. 통 안에 들어가기 전에 소녀는 남자에게 이름을 물었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 그게 내 이름이란다. 곧이어 뱃고동 소리를 내며 배는 출발했다. 소녀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통 안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미국에 도착하고 소녀는 녹초가 되었다. 장시간 비좁고 숨쉬기 힘든 통에서 한 자세로, 화장실이나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던 탓이 컸다. 피니어스는 소녀를 애지중지 대해주었다. 소녀는 그의 간호에 금방 몸을 회복했고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친해진 건 샴쌍둥이 창과 앵 벙커였다. 그들은 팔과 다리는 따로였지만 몸통은 붙어있었다.
앵은 유쾌했고 창은 늘 술이나 담배 냄새가 나 그 둘을 구분하기는 쉬웠다. 소녀는 서커스에서 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소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매혹되고 황홀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열광한다. 피니어스는 대성공을 거두고 소녀는 새장으로 들어간다. 그곳이 그녀의 잠자리이자 생활공간의 전부였다.
피니어스는 다른 사람들에겐 계약서도 쓰고 임금도 지불해주지만, 소녀만은 예외였다. 소녀는 임금도 계약서가 뭔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저 이곳에서 늘 노래하며 피니어스가 자기 남편이 되기를 바란다. 단원들에게도 말해뒀다. 하지만 소녀는 피니어스가 결혼한 것도 자녀가 있는 것도 단원들이 소녀의 이야기를 바보 취급하는 것도 모른다. 그저 꿈에 취해있다. 그러나 꿈은 깨지기 마련이다.
어느날 창과 앵 벙커가 그녀를 가엽이 여겼는지 진실을 말해줬다. 곧장 그에게 달려간 소녀는 따져 물었지만, 소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수에 꽂히는 말들이었다.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돈도 필요 없다,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면 감사히 따르겠다. 청소든 뱃일이든 데려만 가달라고 한 게 누구지! 그의 말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모두 소녀가 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사랑을 느낀 적이 없구나, 소녀는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걸 느낀다. 모두 바보 같고 한심한 자신의 바보스러운 망상이 모든 것들을 망쳤음을 알아차린 소녀는 떠나고 싶지만, 아무것도 없는 소녀는 서커스에 머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제주도에 남았더라면, 그곳에 남았더라면…. 소녀는 절망에, 상실감에 눈물을 흘린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 보잘것 없는 곳이 나의 무덤이 되디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당신의 품일 거라 생각했는데...내 사랑, 내 연인, 내 하나 밖에 없는 임이여, 내가 시름시름 앓다 마음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걸 아나요.
5. 익명의 제보자
보리차는 보도국장에게 이딴 데 아니면 갈 데 없나 큰소리를 치고 나왔지만 진짜 갈 곳이 없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나오기는 했지만, 대낮부터 곧장 술집으로 향하기에는 모양새가 꽤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몇 개 없는 선택지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터덜터덜 주점으로 향했다. 낮이라 그런지 매장에는 한산했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맥주를 마시러 온 사람은 자신뿐만은 아닌듯했다.
보리차는 똑바로 걸었다. 평소처럼 마담이 그녀를 반겼다. 마담은 묘한 분위기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녀는 이 일대에서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로 유명했다. 아는 게 많았지만 젠체하지 않고 한 번씩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 그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지식을 뽐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은 마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불편하지 않아 했고 그녀를 편안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중요한 미팅 자리에 마담을 앉혀두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좋은 기회의 상징이었다.
내부는 바깥보다 서늘했다. 차가운 맥주를 한 잔 시키고 보리차는 바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은 마담을 실컷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녀는 어머, 무서워라. 말했지만 부처의 표정처럼 평화로웠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잔이 잔뜩 쌓여 있었고 술에 취한 보리차는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마담은 아까부터 같은 레파토리를 하는 보리차에 좀 지쳤다. 그때 한 여자가 보리차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자는 포도주 하나를 시키고는 테이블 위에 동전을 올려두었다. 마담은 구세주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자님이신가 보군요. 제보할 게 하나 있는데요.
네? 제…. 뭐야?
여자는 쪽지와 신문 하나를 건넸다. 신문은 얼마 전 버터 스콘 실종 기사였고, 쪽지는 알 수 없었다. 보리차는 쪽지를 보고 여자를 한 번 쳐다봤다. 꽤 값이 나가는 벨벳 정장이었지만,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보리차 옆자리에 앉더니, 친근하게 팔에 손을 얹었다. 신뢰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이런 곳에서는 유혹일 뿐이었다. 그녀는 친근하게 닿았던 손을 걷어내며, 말했다.
후후. 여기를 한 번 찾아가 보세요, 기자님이 아까부터 외치신, 특종! 아주 흥미로운 일이 하나 있으니까요.
특조옹. 흥, 여태 내 말을 코로 들으셨나. 그딴 건 아무 소용이 없어. 지금은 실제의 사건이나 이야기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 그들은 그저 단순하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푹 빠져 있을 뿐이야.
만일, 이것들이 다 사실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진행이라면요?
이게, 대체 뭔데?
보리차가 쪽지를 제대로 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실패다.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이리저리 통통 튀었다. 보리차가 지금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여자는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보리차를 내버려두고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곳의 그 누구도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날 술에서 깬 보리차는 쪽지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뜨며, 제대로 특종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곧장 그곳으로 향한다.
303호 환자.
유라시아 정신병원.
2020년이네요. 2017~18년, 그즈음에 쓴 글인데, 2020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거, 소재, 정말 많이 묵혀뒀고, 오랫동안 쓰려고 했는데, 게으름을 피우다, 어느새 그때의 열정과 정보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인지 먼지 더미 속에서 겨우 찾아내서 더듬더듬 장님처럼 쓰네요.
이 이후의 글은 계속 쓸지 말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언젠가 쓰게 된다면, 더 이후가 될지 아니면 내일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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