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 소설] 단편 모음집

[GL]니니와 이엘 1


 

우리는 미래가 아니라 늘 과거에서 해답을 찾지.

나는 이번에도 그럴 거야.

 

 

 

 

니나와 이엘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니나, 너를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파우더룸에서 내가 선물한 백목 향 향수를 맡지 않았더라면 나는 너인 줄 꿈에도 몰랐을 거다. 

그건 내가 만들었고 너에게 선물한 물건이었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제조법을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을지라도 자기가 만든 물건을 알아보는 법이다. 제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창작자들은 늘 자신의 것을 알아채는 기민함과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특히,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면 더더욱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단 두 개만 존재하는 물건.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니나, 너에게 바쳤다.

 

 

이엘 언니, 오랜만이네요.

 

 

깜짝 놀랐다. 네 목소리가 아닌 거 같아서. 너의 목소리는 원래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잘못 어긋난 소리 같다. 현이 끊어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은 모두 너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잊고 싶었던 너, 잊었다고 생각한 너의 향기. 너를 본 순간, 나는 너를 단 한 순간도 내 세상과 떨어뜨리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이엘 언니. 나는 네가 나를 부르는 그 음절을 가장 좋아했다. 특히, 언니, 라고, 부르는 그 평범한 단어가 나에게만 들려주는 사랑 고백 같아 특히나 더 의미를 두었다.

 

우리는 장소를 옮겨 커피숍으로 향했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조용한 곳에 앉았다. 사실, 너와 벌써 10여 년이나 만나지 않았기에, 할 말은 없었지만, 너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너에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향수 때문에 너를 기억했지, 네 모습에서 너를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너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코트는 다림질했지만, 손목이 많이 닳아 해져있었고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여름 양말과 거기다 보풀이 잔뜩 인 노란색 스웨터와 안에는 하얀 셔츠를 받쳐 입었다. 그 스웨터는 대학생 때 네가 즐겨 입었던 것이었고 체크 치마도 당시 유행했던 가을동화 송혜교 스타일이었다. 대학생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스타일. 나는 네가 꽤 궁핍한 생활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걸 눈치챈 너는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나의 근황에 관해 물었다. 질문에 답을 하면 다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이렇게 조급하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네가 자꾸만 감추려고 드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커피만 마셨다. 다음번에 또 만나자고 했지만, 의례적이고 의미 없는 기약일 뿐이라 여기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고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오래전에 알게 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고 얘기했다. 설거지를 끝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샤워를 마친 남편이 카드를 건네며 그 친구를 계속 만나보라고 했다. 평소 우울증과 공황장애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귀찮은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아마, 바쁜 자신을 대신해 해결책으로 생각할지도 몰랐다. 나는 고맙다며 카드를 받아 들고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기분이 좋은지 우리는 오랜만에 잠자리했다. 나는 콘돔을 껴달라고 했지만, 남편은 그러면 느낌이 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그는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와 주먹을 휘둘렀기에 나는 남편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몇 번이나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생기지 않았다. 원래부터 나를 맘에 들어 하지 않던 시댁에서는 문제가 나에게 있을 거라며 산부인과를 데려갔지만, 문제는 남편에게 있었다. 남편은 무정자증이었다. 하지만 시댁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고 여전히 문제는 나에게 있다며 포커스를 나에게 맞출 뿐이었다. 남편이 막아주기는 했지만, 회사에 있을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 또한 그걸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댁에서는 시험관 아기라도 해보라며 우리를 닦달했다. 그들을 이해해 보려고도 설득하려 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다에 흙을 덮는다고 길이 생기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시도는 해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남편을 설득했다. 남편은 나를 바보 같은 여자라면서 비난했고 결국 마지못해 해주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시댁의 모진 소리에 결국 나는 우울증과 불면을 앓게 되었고, 그런 나를 위해 남편은 가족과의 인연을 끊었고 우리는 시댁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잘 숨은 것인지 아니면 남편이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여태껏 시댁에서 나를 찾아오거나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남편에게 받은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네가 불쑥 들어왔다. 너와의 만남은 어제로 끝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너는 나를 또 만나러 왔다. 나는 너에게 향수 공방을 한다고 했지만, 위치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너는 이 일대의 향수 공방을 다 뒤졌다고 했다. 내가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너는 우물쭈물하며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네가 가버릴까, 서둘러 너를 붙잡았다. 내 모습이 마치, 애걸복걸하고 비굴한 모양새라 네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봤다. 나는 네 옷깃을 놓으며, 남편에게 받은 카드를 흔들며,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했다. 너는 또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젊은 아이처럼 웃는 네가 참으로 예뻤다. 나는 너와는 다르게 잔뜩 늙고 볼품없었다. 너와는 겨우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갑자기 네 모습이 1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너는 한쪽에 진열된 향수병 하나를 집어, 향을 맡았다. 장미 향이었다.

 

 

언니는 원하는 대로 살게 됐네요. 향수 공방에, 이제 원하는 향은 마음대로 조향할 수 있고. 참, 언니가 제게 만들어 준 이 향수, 저 아직 가지고 있어요.

 

그래, 알아. 지난번에 봤거든.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줄 몰랐는데, 고마워.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너는 이런 데를 처음 와 봤는지 이리저리 돌아보며 촌스럽게 굴었지만, 주눅 들지는 않았다. 스테이크와 붉은 포도주 2잔을 시켰다. 스테이크가 나오자, 너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내가 집는 식기들을 보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서툰 칼질. 스테이크는 이리저리 못난 모양새를 했다. 나는 스테이크를 보기 좋게 썰어서 네게 건네주자 너는 부끄러워했다. 네가 접시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아, 내가 직접 일어나 접시를 바꿔줬다. 너는 포크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네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심정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남편도 아직 잘 못해. 그래서 내가 맨 날 해주거든.

 

맞다 언니, 결혼했었죠. 아직 잘 사나 보네요.

 

하긴, 나는 결혼했지만 하지 않은 것처럼 굴었으니, 네가 잊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가 자른 형편없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애써 미소 지었다. 너는 애달프게, 그러나 매혹적이고 웃는다.

 

 

그럼, 아이는요.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 참, 너는 결혼 안 했니? 그때, 진이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아이 얘기가 나오면 시댁 식구들이 떠올라 불편하다.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며 포도주를 마셨다.

 

 

아뇨, 결혼은 무슨…, 언니 말이 맞았어요. 우리 생활에 결혼은 무리였어요. 진과는 동거를 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어요. 진은 성실하지만 정말 시시하고 재미없는 남자예요. 언니 말대로. 진은 미래를 함께할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는 남자예요. 물론, 더 이상 진과 동거를 하지 않고, 그 애는 떠나버렸지만요.

 

 

너는 훌훌 다 떨쳐낸 표정이었지만, 무척이나 괴롭고 슬퍼 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너에게도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 역시도 가난했던 지난날을 청산하기까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던지.

가난을 단순하게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진짜 가난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게으를 거라는 건 오만이다. 나와 내 부모는 늘 성실했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사기나 교활 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새벽까지 노력과 노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고 성실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게 바로 가난이다. TV에서 엄청난 빚을 갚은 한 남자의 이야기는 인간 승리 이야기지만 나머지는 게으름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조금도 노력하지 않는 자들이라며, 혀를 끌끌 찬다.

부자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나 또한 부모님처럼 여유 없는 삶을 살았다. 남편은 세탁소에서 만났다. 그는 내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나는 뜨거운 스팀에 몇 번이나 화상을 입은 팔로 열심히 그의 옷을 다림질 중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는 연고와 대일밴드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내 귀에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TV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됐다. 그리고 순간 그가 나에게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가 일하는 세탁소 근처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 중인 학생이었다. 그는 나보다 5살 어렸고 우리의 첫 관계는 세탁도 구석에서 이뤄졌다. 두 번째는 그의 자취방이었다. 그 뒤로는 그의 자취방에서 종종 거사를 치렀다. 매번 나는 급하고 서둘렀다. 그와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춰, 이 가난에서 구해줄 동아줄처럼, 왕자처럼 어떻게든 그의 아이를 갖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틈만 나면 그와 몸을 섞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그는 곧 내 행동을 사랑으로 알았는지, 서둘러 내 옷을 벗겨냈다.

그는 순진 한 건지 아니면 바보인지 내 꿍꿍이는 전혀 모른 채, 첫 관계에서 내 피를 보자마자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날은 생리 첫날이었는데, 나도 깜빡했었다. 나는 부끄럽게 몸을 돌리며, 그에게 부끄러우니, 저쪽이 가 있으라 하며, 생리대가 붙은 팬티를 조심스럽게 입으며, 그가 책임지겠다는 말에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우리의 결혼은 일사천리였다. 시댁은 나에 대해 못마땅해했지만, 장손이고 3대 독자인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결혼한 뒤 가난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동안 질긴 가죽처럼 어떻게 해도 벗을 수 없는 게 이토록 쉽게 떨어져 나간 게 어이없을 정도였다.

너는 식사를 마치고 차 한잔을 하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너와 헤어지고 공방으로 돌아온 나는 음성메시지에 남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1년에 2번씩 동창회에서 문자나 편지가 왔다. 어느 날부터 나는 동창회에 나갔다. 너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기는 했지만 너는 한 번도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너의 소식은 근근이 들려왔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들이었고, 그마저도 나중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여유가 생겼지만 공허하고 외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꽤 속이 뒤집어졌다. 어느 날 TV에서 조향사에 관한 다큐를 봤다. 나는 따분하고 할 게 없기에 그날 저녁에 남편에게 조향사나 해볼까? 흘려 말했다. 남편은 내가 뭔가를 해보려는 시도에 당장이라도 뭐든 해 줄 것처럼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학교에 나는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니나, 너를 처음 만났다. 아직 순박하고, 사랑이 전부라고 믿던 20살의 어린 너. 한때 나와 똑같이 가난했지만, 햇살처럼 싱그럽고, 소녀 같은 너. 네 목덜미에서는 늘 백목 향이 났다. 또, 자취방에 공용으로 놓여있는 흔하디흔한 싸구려 샴푸를 사용해도 너는 그걸 고급스러운 향으로 둔갑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너에게 반하지 않는 친구들은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 또한 너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네 젊은, 싱그러움, 열정, 눈부심, 나와 다르지 않지만 너는 분명 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게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거울을 보니 팔꿈치에 거스름 같은 게 일어났다. 언제 상처가 난 걸까. 나는 거스름을 살살 손끝으로 문질렀다. 턱에 전화기를 받친 채 책상 위에 있는 핸드크림으로 살살 펴 발랐다.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너에 관해 물었다. 동창은 왜 또 그 이야기냐며, 웃다가 잠시 생각하셨는지 침묵이 이어졌다. 동창도 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나는 손님이 왔다며 그만 끊자고 말했다. 그런데 동창에게서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걔, 진과도 헤어지고, 어느 날부터 미쳤다고 했어요. 걔 그런 모습 보고, 주변 사람들도 좀 놀란 거 같더라고요. 여기저기 난동 피우고, 사람들이 말려봤지만 안돼서 경찰서에도 몇 번 들락날락했데요. 게다가 목소리는 어찌나 기괴하게 변하던지,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데요. 아무튼 원인은 진이 아니라 니나에게 있었던 거 같더라고요. 성정도 원래 꽤 난폭했나 봐요, 그러니 진이 버릴 만했죠. 아무튼 그러다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가 싶더니 언니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아직 목소리가 망가진 원인을 찾지 못했구나. 그런데 네가 나를 찾다니. 퍽,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너는 늘 떠나는 쪽이었고 기다리는 건 늘 나의 몫이었으니까. 동창에게 이번 동창회에 참석할 테니 회비를 묻는 것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소파에 있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평소와는 다르게 집에는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서둘러 겉옷을 벗으며 저녁 준비하겠다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앞치마를 둘러멨다.

 

 

괜찮아. 좀 피곤해서 일찍 온 거야. 배 안 고프니, 천천히 해.

 

왜, 어디가 안 좋아요?

 

아냐, 심각한 건 아니고, 두통이 조금 있어.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누워있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의 기분은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담부턴 일찍 오면, 온다고 말해줘요.

 

알았어….

 

그런데, 진짜 무슨 걱정거리 있어요? 아까부터 안색도 안 좋고 별말이 없네요.

 

걱정은 무슨. 그냥, 오늘 길에서 첨 보는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좀 기분이 이상해.

 

이상한 사람? 왜요 뭐라고 했는데?

 

아니, 별말은 안 했고… 지금 와선 생각도 안 나.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자고.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녜요?

 

씁. 쓸데없는 소리.

 

 

남편은 기업 인수합병(M&A) 전문가였다. 그래서 주변에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아는 바가 없고 도움을 줄 수 없으니, 그저 그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너는 또 찾아왔고, 나는 공방 문을 잠그며, 너와 식사하러 나왔다. 너와 벌써 두 번이나 함께 하는 점심이었다. 이번에는 네가 평소에 가는 식당으로 가자고 하니, 네가 망설인다.

 

 

맘에 들지 않을 거예요. 거기는 언니 같은 사람이 가기엔, 좀 많이 더럽고 비좁아요.

 

 

나는 네 말을 그냥 넘기며, 앞장서라고 말했다. 너는 망설이면서도 발걸음은 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네 말처럼 가게는 더럽고 비좁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오지 못할 곳도 아니었다. 오래된 가게이기는 하지만 이런 가게가 진짜 맛집이었다.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나는 이보다 더 못한 생활도 했었다. 매일 끼니를 굶기도 했고 때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배를 때우곤 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신분 세탁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네가 말하는 서민 음식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런데도 너는 마치 과거의 나는 몽땅 지워버리고는 달라진 부자 사모님이란 소리를 듣는 내 모습만 진짜인 것처럼 굴었다.

 

 

언니, 내가 손 닦아 줄게요.

 

 

너는 물수건으로 내 손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네 행동에 당황한 내가 손을 빼자, 네가 다시 내 손을 잡아 하나하나 깨끗하게 닦아준다. 마치 마리아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아 준 것처럼. 네 행동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나쁘지 않아 내버려두었다.

'[창작 소설] 단편 모음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NL] 베일에 싸인 환자 2  (0) 2024.11.30
[NL] 베일에 싸인 환자  (0) 2024.11.28
[NL] 피그말리온 효과.  (0) 2024.11.14
[GL] 종족 1  (0) 2024.11.13
[페르세포네x하데스] 어떤 의뢰  (0) 2024.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