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2편, 무생채에는 요구르트를 넣어라.
무반 통을 (흰 부분으로) 깨끗이 씻어서 준비한다. 너무 지저분하지 않으면 굳이 깎아낼 필요는 없다. (거슬리는 사람은 필터로 깎아라.) 깨끗이 씻은 무를 반으로 가르고 채칼이나 칼로 (둘 다 상관없으니 각자 편안한 도구로 사용한다.) 채를 썬다.
채칼을 쓸 때는 반드시 장갑을 끼고 해야 손이 안 베인다. 남은 꽁다리는 무리하게 채칼을 이용하기보다는 (솜씨가 없어도 괜찮으니) 칼로 써는 게 더 낫다.
채 썬 무에 고춧가루, 간 마늘, 생강가루, 매실청과 설탕, 액젓, 새우젓, 소금을 넣고 살살 무친다. 봄철 무는 단맛이 있지만, 그래도 설탕을 넣어주는 게 맛있다. 마지막으로 요구르트 작은 거 1/3을 넣어 준다. (무생채는 물이 많이 생기면 안 되니, 요구르트는 양이나 눈대중으로 적당히 넣는 게 좋다. 또 봄철 무생채는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고 산뜻하게 무치는 게 포인트다.) 마무리로 통깨를 넣고 살살 무쳐주고 접시에 푸짐하게 올리면 무생채 끝. 냉장고에 30분 정도 넣어서 더 아삭하게 먹어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갓 만든 반찬을 뜨거운 밥에 참기름 넣고 쓱쓱 비벼 먹어도 좋고, 여기에 반숙 달걀부침을 올려 먹어도 정말 맛있다.
미아는 무생채에 고등어 생강 조림을 번갈아 가면서 먹는 중이었다.
“음, 맛있어~.”
아, 미아 씨가 먹는 거 보니, 나도 또 배고파지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다. 아씨, 너무 늦게까지 먹으면, 살찌는데. 하지만 저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아삭, 단짠에 흐르는 달걀노른자~. 밥 안 먹는 아이도 밥상에 앉힌다는 절대 조합! 결국 여주는 그날 밥 한 공기를 더 퍼와 미아와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는 굳이 미아 씨가 한다 해서 내버려뒀다. 여주는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아가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둘은 마주 앉았다. 아, 노곤해. 배부르고 엉덩이 따시고, 편안하고 피곤하다~. 늘어져 있는 여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미아가 입을 연다.
“대리님은 어쩜, 이렇게 요리도 척척 잘해요.”
“아하하- 그게 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죠.”
어깨너머는 무슨 개뿔, 먹고 살다 보니 그냥저냥 된 거지.
“참, 대리님은, 여동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저 때문에 지금 이 시각까지 못 들어….”
“어, 아뇨, 아뇨. 동생은 지금 학원 가서 없으니 신경 쓰지 마요.”
“아~. 그럼 부모님은….”
“당연히 독립했으니, 여기 안 계시죠. 아버지는 미아 씨도 알다시피, 작년에 돌아가셨고.”
“참, 그랬죠. 그러고 보니, 대리님 아버지, 연구원이라고 하셨죠. 성이 특이해서 찾아보니까, 굉장히 멋진 분이시더라고요.”
“네. 뭐, 그렇죠.”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집은 여주가 쓰라고 했지만, 독립한 집이 회사와 더 가까워 거절했다. 결국 서울 집은 세 놓고 새엄마는 홀로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에서 지금은 텃밭을 꾸리시면서 소소하게 사시고 계셨다.
여주는 몇 살 때 할머니에게 맡겨졌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23살 때까지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여주를 낳고 몸이 안 좋아지셔서, 얼마 안 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한동안 여주를 잊고 살다가 여주가 12살 때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한 번 찾아왔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절대 안 된다며, 너 같은 후레자식에게 절대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자신을 끔찍이 생각한다는 걸 알고 아버지는 한발 물러섰다. 여주는 23살 때까지 할머니의 손에 자라, 부모의 애정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애정을 받으며,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랐다.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좋았다. 그러나, 아이는 모두 어른이 되고 어른은 언젠간 죽는다. 23살, 서울로 올라온 여주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재혼할 여성과 그 옆에는 초등학생?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말이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는 긴 시간 동안 접점이 없어서 그런지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할머니는 자기 자식은 못마땅해하더니 새어머니의 사정을 다 들으시고는, 가여워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러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면서 끝끝내 재혼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재혼을 굳이 막아서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새어머니에게 잘했다. 그때 할머니가 주신 따스한 사랑을 새어머니는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며, 시골로 내려가서 살고 있었다. (시나는 엄마가 아버지를 잊지 못해서 떠나간 줄로만 알지만.) 어쨌든 새어머니는 가끔 삼촌을 통해 야채를 보내주시며, 안부 인사 겸 시나 학업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시골집에서 뭔가를 찾으셨다고 한번 들르라고 했는데, 여태 까먹고 있었다. 조만간 안부 전화라도 한 번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참, 미아 씨는 현재 언니랑 같이 산다고 했죠. 전세 사기 때문에… 아, 미안해요.”
“괜찮아요, 뭐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미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다시금 그 끔찍한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 입술이 비틀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아는 여주에게 솔직한 심정을 내비치고 싶었다.
“그건, 이제 됐어요. 어차피, 해결될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사실, 언니 가게에 악풀 달린 게 한두 번이 아녜요. 그 딴에 코로나가 끝나서 겨우 가게가 살아나나 싶다가, 이번엔 이게 무슨 일인지.”
“아….”
“언니는 늘 성실하고 좋기는 한데, 힘든 일이 있을 땐 저한테 기대질 않아요.”
“….”
“분명 제가 미덥지 않은 거겠죠. 전 예전부터 언니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커피를 마시며, 여주는 남의 가족사에 대해서 딱히 자신도 끼어들기도 조심스러워 조언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미아의 조금 전 말에 손쉽게 아뇨, 언니가 그럴 리가요, 라고, 말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사정도 모르고 손쉽게, 말하기엔 일렀다.
그나저나, 미아 씨는 외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있었구나. 나도 저렇게 지탱해 주는 언니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학업이나, 연애 문제에 고민을 해주고 같이 싸우고 놀고….
“사실 저도 부모님이 바빠서 제가 직접 요리했던 적이 많았어요. 물론 번번이 요리는 실패했죠. 제가 제일 잘하는 건 달걀이나 라면 정도랄까.”
“뭐, 여자라고 다 요리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 손맛 따라 다 다른데요. 뭘. 그리고 저도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대리님은 그래도 저보단 잘하시잖아요. 그리고, 전 언니에게 늘 버팀목이자 좋은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요.”
“?…”
“….”
“…에? 여자 친구요?”
“네.”
“어… 그러니까, 언니가 친언니가 아니라… 그 언니요?”
“어머?!”
아, 그래서 미아 씨의 음식에서 사랑의 맛이 났구나. 어?, 아차차. 이게 아니지. 이런 것까지 알려주지 말라고. 이 망할 솥아! 진짜 남의 연애사 따윈 알고 싶지 않아! 바이든, 레즈비언이든, 게이든, 노말이든 상관없으니, 남의 연애 따윈 알고 싶지 않아!
애써 들썩이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며, 여주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미아의 음식을 맛보는 순간, 미아의 연인도 용기와 사랑에 빠질 것이었다. 할머니의 솥은 마법이니까.
“아하하, 요즘은 뭐 다양하게 사귀는 추세긴 하죠. 하하.”
“….”
“흠, 전 연애는 잘 모르겠는데, 꼭 미아 씨가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요. 애초에 못 하는 걸 억지로 잘할 필요도 없고. 언니가 그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해요?”
“아뇨.”
“에이, 그럼 됐죠. 그리고 못하는 걸 이렇게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비록 결과가 안 좋게 나올지라도. 뭐, 미아 씨랑 언니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언니에게 솔직하게 지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옛말에 위기를 같이 해결하는 연인이 더 오래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네요.”
철컥. 띠로리~
“언니, 나 배고파. 밥 줘. 어? 손님이 있었네?”
“어머,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이만 가볼게요.”
미아는 갑자기 들어온 동생 때문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9시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 여주도 신발장 앞에 섰다. 신발을 신다 말고 미아는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저 때문에 부장님한테 여주 씨 밉보인 거 아니에요?”
“엥? 왜요?”
“일주일간, 1시간 일찍 퇴근시켜 달라는 거 부장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잖아요.”
“아아- 그거요. 걱정마요, 아주 깔끔하게 해결해 주실걸요, 물론 부장님 아버지가요.”
“네? 부장님 아버지요?”
“네. 헤헤헤.”
미아는 모르겠지만, 부장의 아버지는 미아와 여주 그리고 부장이 다니는 회사의 회장님이었고 부장이 낙하산이라는 걸 미아는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 사실을 자신도 우연히 알게 된 거였기에, 미아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참, 언니가게 알려주세요. 언제 갈 수 있으면 가보려고요.”
미아 여주는 작별 인사를 하고, 여주는 미아가 알려준 식당을 찾아 보다 깜짝 놀랐다. 어라? 이 블로그는….
*
“대리님, 대리님!” 미아였다.
“무슨 일이에요, 미아 씨? 되게 기분 좋아 보이네요.”
“아, 그게… 사실은 대리님이 알려주신 요리 가져갔더니 언니가 너무 맛있고 의욕이 솟는다면서,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사랑을 맛보고 기운이 없을 수야 없겠지.
“잘됐네요.”
“그리고, 악풀을 남겼던 블로그가, 사과문을 올렸어요.”
“그래요. 그것도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부장님이 요 며칠간, 저 우울할까 봐 매일 점심이며, 커피값이며, 저 신경 써주셔서 너무너무 좋아요. 아, 부장님이 또 부르시네, 먼저 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신나게 뛰어가는 미아를 보며, 여주는 하긴, 부장의 남편이 실수한 거니 만회해야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블로그는 미세스 마우스의 남편 미스터 코가 운영하는 미식 블로그였다. 그 촌스러운 메인화면과 코 모습을 떠올리며, 여주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미아 씨가 알려준 식당을 보다가, 맨 위에 올라와 있는 낯익은 블로그가 설마 부장의 남편이었을 줄이야. 그 커다란 코를 보자, 기억난 게,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예전에 자랑삼아, 부장이 말했던 미식가 블로그를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도움은커녕, 요리 수업을 끝으로 미아 씨의 고민을 어떻게 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뭐, 꼭 뭐를 해주지 않더라도, 고민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불편한 건 사실이니까.
미아가 돌아간 다음 날 오지랖이라고 생각 들지 모르겠지만, 여주는 부장에게 이 사실을 넌지시 던졌고 부장은 자기 남편이 올린 글을 보았을 것이다. 그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며 갑자기 퇴근하는 부장을 팀원들은 알지 못했고, 여주는 알았다. 집에 가서 얼마나 날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기 남편이 그같이 극악무도한 짓을 보고 나에게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망신을 안 당해서,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게 만들어 준 나에게 고마움을 내비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좋은 게 좋은 거란 마음으로 절대 비밀을 지키는 조건으로 한동안 편안하게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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