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옛말에 돼지는 버릴게 없다고 했어. 우리가 먹는 삼겹살은 서양에선 소금에 절여, 베이컨으로 먹잖아. 내장은 순대, 등뼈는 감자탕이지.
에헴,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특히 지방이 적고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 볼살은 아는 사람만 아는 맛이지. 서양에서 먹지 않는 돼지의 부위도 한국에선 모조리 식자재며, 먹거리야. 고사에 자주 사용하는 돼지 머리는 서양인들에게는 충격이겠지만, 이 머릿고기 편육이 정말 맛있는데, 그 맛난 걸 왜 모르는지~. 하긴, 맛있는 건 장롱과 속옷 깊숙이 숨긴다는 말이 있듯이, 경쟁자가 적은 게 중요하지. 또 어느 책에서는 돼지 오줌보로 축구공을 만들었다는 것도 봤어.
그러고 보니, 서양에서도 돼지는 알뜰하게 발라먹는 거 같던데. 베이컨, 훈제햄, 민스파이, 생소세지, 솔트포크 등등, 아, 거기다 라드까지 나오니, 정말 돼지는 알뜰하게 먹는 식품이네.“
“이래서, 먹는 건 기여주라니까. 그렇게 먹는 걸 잘아니, 아주 똑띠에, 척척 박사라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 뭐 먹을 건데.”
“니가 하도 돼지 예찬을 했으니 돼지로 먹자. 보라한텐, 내가 연락할게. 우리, 자주 가는 그 삼겹살 집에서 보자.”
“콜~.”
여주는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오늘은 돼지로 뭘 먹을까 생각했다. 띠링. 문자가 와 열어보니 삼겹살에 소주로 결정이 났다. 좋기는 한데, 항정살도 먹고 싶고, 목살도 땡기는데~. 아, 몰라, 몰라. 시간아 빨리 가라.
여름 6편,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일 때는 소주에 고기 좀 구워야지.
여주가 들어오자, 먼저 와서 고기를 굽고 있던 둘은 여주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야~ 기여주~ 너, 너무 오랜만에 나오는 거 아니야? 미혼인 주제에 기혼인 나보다 바쁘면 어쩌자는 거야.” 애영이였다.
“아, 미안, 미안. 내가 대리 달고, 후임까지 바로 들어오는 바람에 한동안 바빴어. 대신, 오늘은 동생도 없겠다. 밤새워 마실 수 있다. 이거야~. 자, 짠 하자.”
여주가 재빨리 착석하며 자신의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 시나, 방학아냐? 어디 갔는데?” 보라가 말했다.
“방학맞고, 지 언니 버리고 친구들이랑, 2박3일 부산으로 놀러 갔다.”
“그럼, 여주, 오늘 진짜 밤새는 거야~ 오케이, 내일 주말이고 하니, 나도 밤새서 달린다. 중간에 낙오하지 마라, 너희들.” 애영이 음흉한 얼굴로 말했다.
“야, 야. 애영아, 넌 니 남편도 있으니,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보라가 애영을 말리며 말했다.
“에이~ 술맛 떨어지게 이거 왜 이래. 내가 비록 결혼 했지만, 마음만은 아직 미혼이거든.”
“아이고, 그래요~ 나중에 취해서 남편아~ 나 데리러 오라 하는 게 다 보이는데~. 안 그래 여주야?”
“맞아, 맞아. 결혼 3년 차는 아직 신혼이니, 대충 마시고 들어 가세요~. 알겠죠. 우쭈쭈.”
“우 씨.”
둘의 약 올림에 애영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참, 너 이번에 나온 웹툰 잘 보고 있다. 인기 엄청 많던데.”
“맞아. 우리 직원들도 다 네 웹툰 보고 있어. 지하철 출 퇴근 길에서도 보니까 다들 네 웹툰 보고 있더라고.”
“그래? 반응 어때, 재밌데?”
“응, 엄청 재밌데. 특히 회사 성희롱 문제, 많이들 공감하더라. 우리 회사에서 어쩌면 너한테 연락 갈지도 몰라.”
“왜?”
“당연히, 성희롱 방지 포스터 그려 달라 고지.”
보라의 말에 애영은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고 있었다. 웹툰 2년 차에 한참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애영은 한때 우울과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던 친구였다. 30이 되면 죽겠다는 걸 말려도 안 듣더니, 어느새 결혼도 하고 웹툰 작가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애영이 대단하기만 하다.
“야, 애영아, 딴 건 몰라도 진짜 펑크만은 내지 마라. 나 요즘 그것 때문에 진짜 짜증나려고 해.”보라가 소주를 들이키며 말했다.
“왜, 왜? 또 어떤 작가가 너 괴롭혀?” 애영은 보라가 속 버릴까 봐 고기를 입에 넣어주며 달래는 중이었다.
“어엉~ 띠발, 내가 그 좆같은 작가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보라는 한때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였지만 지금은 출판사 편집장이었다. 유령 컴퍼니? 요상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잘 다니고 있는 거 같다. 학창 시절에 공모전이며 학교에서 열리는 창작대회란 대회는 다 휩쓸어서 다들 문예창작과로 갈 줄 알았는데, 집에 빛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밑에 쌍둥이 동생을 생각해 꿈을 접고 출판사로 바로 취업해서 담임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이 말릴 정도로 많이 아쉬워했었다. 다만, 보라는 꿈을 접은 게 아니라, 잠시 미뤄둔 거였다.
맏이인 보라의 희생을 알기에 보라의 쌍둥이 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번에는 자신들이 보라의 뒷바라지를 하겠다며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보라는 화가 단단히 났다. 동생들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걸 뜯어말리는 동시에, 보라 자신도 야간대학을 졸업하는 걸 빌미로 동생들을 다 대학과 유학까지 보냈다. 아직 빛이 많이 갈 길이 멀지만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생들이 틈틈이 돈을 보내 열심히 갚아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보라는 고기 굽느라, 제대로 먹지 못하자, 여주가 집게를 뺏어들었다.
“야, 내가 구울 테니까, 보라, 너 얼른 먹어, 먹어.”
“아이 됐어. 여주 너 고기 못 굽잖아.”
“에헤이~. 과거에 기여주가 아니란 말씀. 회사 다니면서 내가 고기 굽는 스킬이 얼마나 늘었는데. 자, 봐라. 이 신의 솜씨를.”
여주는 불판 위에 있는 고기를 재빨리 뒤집어서 가위로 쓱싹쓱싹,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그리고 잘 익은 고기들을 놓아주며, 콧대를 뽐내는 여주에 둘은 명이나물에 고기를 사먹으며 여주를 항해 쌍 따봉과 박수를 보냈다.
“진짜 장족의 발전이다, 여주, 너. 음식이라고는 평생 받아먹고 살 줄 알았더니. 네가 구운 고기를 받아먹게 될 줄이야.”
“난 태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기특하다, 우리 여주.”
애영이 여주의 엉덩이를 토닥이자, 여주는 질색하면 됐고 얼른 먹으라고 고기를 가로 놓아줬다. 그러면서 자신도 한 점 맛보았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다. 회식이 아닌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서 맛보는 고기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여주는 상추에, 쌈장 조금, 고기 두 점과 파김치 올리고 여기에 아릿한 고추장아찌까지 넣으면, 크! 이거지 이거. 잘 구워진 고기의 육즙과 톡 하고 터지는 알싸한 파김치가 입안 가득하다. 그리고 고기를 먹고 목에 낀 기름을 소주로 넘겨주면, 크~, 행복하다.
여전히 식탁 위에는 쌈 싸 먹을 게 너무 많았다. 명이나물, 양파절임, 고추장아찌, 쌈장, 갈치속젓, 마늘, 어떻게 먹어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여주와 보라, 애영의 단골집인 이 집은 명이나물과 갈치속젓을 아낌없이 퍼 주고 국내산 한돈만 쓰는 곳이었다. 여기 사장님은 80대 할머니로, 손맛이 좋아, 이 일대에 돼지고기 거리를 만든 유명한 분이셨다.
특히 반찬으로 아릿하지만 감칠맛 도는 고추장아찌와 매일 같이 맛있는 김치랑, 탄산처럼 톡 쏘는 묵은지가 일품이었다. 3년 묵은 쿰쿰하고 맛있게 익은 김치를 고기를 돌돌 말아먹으면, 입안에서 코끝으로 톡 하고 터지는 김치의 맛과 고기는 안 먹어 본 사람은 논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아, 츄릅. 그만 생각하자. 생각할 시간에 시키는 거야.
“야, 너희 둘 다 김치찌개까지 먹고 가는 거 잊지 마.” 여주가 비장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여기 김치찌개를 포기하는 건, 냉면에 달걀을 잊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사장님, 여기 고기 많이 넣은 김치찌개 한 개 주세요.”
부엌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구부정한 할머니가 보라의 얼굴을 보고는 반가운지 방긋 미소 지었다. 곧이어 낡고 오래된 뚝배기에 용암처럼 끓고 있는 김치찌개와 달걀부침 세 개가 나왔다.
“어? 저희 달걀부침 안 시켰는데?”
“아, 할머니가 서비스로 드리래요.” 훈훈하게 생긴 20대의 앳된 얼굴의 청년이었다.
“어? 첨보는데, 알바생? 손주?” 애영이 물었다.
“둘 다요.”
“스무 살?”
“아뇨, 스물 둘이요.”
“오, 그럼 군대는 아직이겠네~.” 보라가 말했다.
“아, 네. 근데 저 담주에 군대 가요.”
“그래, 빨리 갔다 오는 게 좋다더라.”
“기여. 할아버지 말씀처럼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아.”
“아, 할머니~ 달걀부침 넘 감사해요.” 보라가 평소엔 부리지 않던 애교와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들 왜 이리 오랜만에 왔어?”
“먹고살기에 바빠서 그렇죠. 근데, 오랜만에 왔는데도 할머니, 정정하신 거 보니, 앞으로 30년은 거뜬하겠네."
“에구, 망측스런 소린 그만 해. 난, 이렇게 좀 더 살다 갈 거야.”
“에이~ 그런 말 마셔, 그럼 우리는 어디 가서 이 맛 좋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이 고추장아찌는, 이 요망한 갈치속젓은! 아, 할머니 먼저 가면, 절대 안 돼! 내가 저승사자 멱살을 잡아서라도 할머니 절대 안 보내.”
“맞아, 앞으로 더 자주 찾아와 많이 먹고 갈 거야” 애영이 보라의 말에 맞장구치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들 됐어. 느그들 잘 먹고 잘사는 게 최고여. 우리 집 안 와도 잘 만 살고, 좋은 소식만 들려오면 돼.”
“에헤이~. 아니, 근데 우리 할매, 언제 저렇게 장성한 손주가 있었대.”여주가 능글맞게 말했다.
“저기요,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아, 잠시 만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손주는 90도로 인사 하고 자리를 떴다.
“예의바르네.” 보라가 말했다.
“내 나이에 손주가 없으면 쓰나. 에구, 내 정신 좀 봐. 고기가 얼마 읎네. 내가 서비스로 좀 더 줄 테니까….”
“아이, 됐어, 됐어.”
여주가 할머니를 말려도 오랜만에 찾아온 세 아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뭐라도 한 입 더 먹이고 살뜰히 챙겨 보내는 게 그의 삶의 철학이었다.
고기 반인 뚝배기에 용암처럼 튀는 국물들을 피하며 그들은 재빨리 숟가락을 담갔다. 한 입 먹는 순간, 연륜의 손맛이 느껴진다. 적당히 익은 묵은지가 기다랗게 숟가락에 고기와 함께 딸려 오면 입김으로 좀 식힌 뒤 바로 집어넣으면 얼큰하고 시큼한 맛이 입안 가득하다. 평소 신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여주도 이 집 신김치만은 포기할 수 없는 맛이었다.
김치찌개를 맛본 그들은 고개를 들어 서로의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안 시킬 수 없다. 이미 배는 충분히 부르지만, 맛있는 김치찌개를 맛본 위장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오늘만큼은 위장을 좀 더 개방시켜 주겠다는 포부를 위에게 당당히 밝히고 양푼과 밥 세 공기를 시켰다. 좀 많이 시킨 거 아닌가 싶지만, 들어가라면 또 들어가는지라 양푼에 밥 세 공기와 김치찌개 그리고 계란부침까지 넣으니, 맛깔스러운 냄새와 비주얼에 숟가락을 너나 할 것 없이 들이댔다. 음~ 맛있어. 여기에 김 가루를 뿌리면 더 맛있겠지만, 이건 이거대로 맛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쓴 소주까지 딱 넘겨주면, 크~ 완벽한 마무리다.
주변의 다른 직장인들도 그들이 먹는 모습에 침을 꼴딱 삼키며 김치찌개와 양푼을 추가로 시켰다. 그날 삼겹살집은 김치찌개와 양푼 파티였다.
*
“나 집에 도저히 못 가겠어. 차라리, 여기서 자자.”
“야, 야 정신 차려 애영아~아, 니 남편 곧 온다니까 좀 만 버텨.”
애영은 두 사람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 둘은 휘청휘청했다.
“야, 우리 집에 가자~”
“야, 우리도 가고 싶지. 근데 너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오―.”
“아~ 우리 남푠 괜차나~. 내가 돈도 더 많이 버는데 뭘~.”
애영의 남편이 저 멀리서 진땀을 빼면서 달려오는 걸 보며 두 사람은 이때만큼 애영의 남편이 반가웠던 적이 없다. 애영은 자신의 집으로 두 사람을 끌고 가려 했지만 보라와 여주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애영을 보내고 남은 둘은.
“자, 그럼, 애영이도 갔겠다. 2차 고~”
“당근이지. 빼지 말라 심보라.”
“어쭈 많이 컸는데 기여주.”
“내가 너보다 3센티 더 크걸랑~”
“오, 선전포고냐. 덤벼~!”
애영에 비해 주량이 센 둘은 유유히 2차 술집을 찾으러 골목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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